1993년 8월 18일.
금융실명제 전격 실시
1993년 당시 초등학생 아니 국민학생이었던 나도 기억하고 있는 ‘금융실명제 실시’
어떻게 이루어졌고 현재의 자본시장에 어떤 영향을 끼쳤을까?
우리는 현재 신분증이 없으면 계좌를 개설할 수 없다.
이게 다 금융실명제 이후로 내려온 변화이다.
금융실명제 1트 전두환 정권 : 실패
어릴 때야 김영삼 정부 시절에 금융실명제가 실시 된것만 기억하고 있지만 20대가 되고서야 전두환 정권에서 금융실명제 ‘시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되었다.
61년 7월 29일에 시행된 예금·적금등의비밀보장에관한법률에 의해 익명 계좌로 거래를 할 수가 있었다.
모두가 이런 거래를 했다는 의미는 아니지만 이런 익명계좌에 비자금이 많이 흘러들어왔다.
소유한 재산에 대해 부과하는 ‘재산세’가 있는데 차명, 익명으로 분산시킬 경우 이 재산세를 피할 수 있었다.
이는 조세 불균형을 초래하게 된다.
금융실명제 필요성이 본격적으로 대두된건 전두환 정권때의 ‘장영자 사건’이었다.
전두환 정권의 테크토크라트였던 김재익 경제수석비서관이 지하자금을 양성화 하고 제2의 장영자 사건을 막고 조세불균형을 개선하기 위해 금융실명제가 필요하다고 건의했다.
전두환은 경제에 대해 김재익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있었고 민심 얻기에도 좋은 정책이라 추진하고 ‘금융실명거래에관한법률’까지 제정하였으나 이 법이 시행되면 비자금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허삼수와 허화평이 강하게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당장 정권의 통치자금에 영향을 받기에 강하게 반대하는 허삼수 허화평을 무시하고 추진하기 어려웠을 것.
이 금융실명제 저지 사건은 허삼수와 허화평이 쫓겨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금융실명제 2트 – 김영삼이 성공
준비과정
‘금융실명제’는 김영삼의 대선 공약이었으나 많은 반대와 어려움이 예상되는 제도라서 그걸 실제로 실행할 줄은 몰랐다.
93년 2월 25일에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하여 6월 말에 금융실명제 추진에 들어갔다. 취임 3개월 만이다.
이경식 경제부총리, 홍채형 재무부 장관이 이를 극비리에 추친했다.
실국장급만 모아 과천 사무실에서 극비리에 추진하였다.
D-Day : 긴급명령 발동
1993년 8월 12일 목요일 19시 45분 갑작스런 출금사태를 방지하기 위해 은행이 모두 문을 닫은 뒤에 긴급재정경제명령 제16호 《금융실명거래 및 비밀보장에 관한 긴급재정경제명령》을 실시하였다.
민주주의 국가에서 입법부를 거치지 않고 시행하는 대통령의 긴급명령권 발동은 매우 드문 일이나 정식 절차를 거치면 비공식 경로로 세상에 모두 알려져 비자금이 다 빠져나가기 때문에 긴급명령권을 발동하였다.
이 조치를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전문 링크)
- 실명확인 없이 비실명계좌의 인출 금지
- 인출 3천만원 이상이면 국세청 통보.
- 실명 전환 의무 위반자에게 과징금 부과
- 8월 12일 20시 부터 이 조치를 실행.
실시 초기에는 주가 하한가 폭락, 8월 13일 오전 은행 영업 일시 중지, 은행 창구에서 신분증 요구(실시 이전에는 신분증을 요구하지 않았으니)하는 혼란이 있었다.
시행 후 김영삼 지지율 급상승
‘1993년 대한민국 100대 스타’에 연예인을 제치고 김영삼 대통령이 1위를 했다.
김영삼 대통령의 큰 업적을 꼽으라면 단연 하나회 숙청과 금융실명제일 것이다. 김영삼 싫어하는 사람도 이 두 사건은 대부분 높게 평가한다.
하지만 IMF와 김현철(김영삼의 아들)비리로 정권 말에는 인기를 잃었다. 심하게 잃었다.
김현철의 비리는 이 금융실명제 덕분에 드러났다.
실시 후 효과
제도 시행 후 차명계좌 개설이 어려워지면서 고위 공직자들의 비리 규모가 크게 줄었다. 독제에서 민주화로 가는 과정이었기에 비리 액수가 줄어드는 효과였겠지만 금융실명제의 효과도 어느 정도 있다고 판단된다.
차명계좌는 근절되었을까?
차명계좌는 여전히 존재한다. 100% 막기는 어렵기 때문. 하지만 금융실명제 실시 이전에 비하면 크게 줄어들었다.
차명계좌의 수요는 항상 존재하고 현대에는 경제적 어려움이나 사기(취업사기)를 이용해서 이 차명계좌를 조달한다. 한동안 명의를 빌려준 사람은 처벌받지 않았지만 이제는 명의를 빌려준 사람도 처벌을 받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