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의 부정선거.
앞의 2.28 민주화 운동에서도 서술했듯 선거 시작 전 부터 아주 자유당은 민주당을 집요하게 방해했다. 3.15 부정선거는 ‘부통령’ 선거에서만 벌어졌다.
대선 상황
이전 대선에서 민주당 대선후보 신익희가 유세중 지병으로 사망하여 선거에 호재였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장관이었던 조봉암에게 득표율 30%를 내어주고 이미 사망한 신익희에게 찍은 표도 185만표나 되었다.
자유당은 대선이 끝나자 다음 대선을 준비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대선에서 대선 직전 야당 대통령 후보였던 조병옥이 지병으로 사망했다.
부통령 선거가 자유당에겐 문제
부통령 선거가 문제였다.
대선은 경쟁자였던 조병옥이 사망했고 득표율 30%만 넘으면 되었기에 큰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부통령 선가가 문제였다.
이승만이 고령이고 건강상태가 좋지 않아 보였기에 사후를 대비할 부통령을 야당 후보가 당선되게 놓아둘 수 없었던 것.
당시 자유당(여당)의 후보는 이기붕이었고 이미 이전 선거에서 민주당 장면에게 압도당했다.
그러다 1960년 3월 15일 대선에서 최인규를 중심으로 한 자유당은 집요한 방해를 시작했다.
부정선거 자금조달
부정대출을 이용하여 기업인들에게 자금조달을 받아 70억환을 모았고 정부 토목사업 예산에서 80억환을 전용받아 사용하였다.
자금조달에 가담한 정치인, 공직자
- 박용익 (자유당 총무위원장)
- 송인상 재무장관
-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
- 김영휘 한국은행 부총재
- 배제인 한국은행 부총재
- 김영찬 산업은행 총재
자금 조달에 참여한 기업
- 대한양회
- 극동해운
- 중앙산업
- 경남모방
- 동양시멘트(현 삼표시멘트)
- 삼호방직
- 대한방직협회
- 삼성물산
- 태창방직
- 대한방직
그 당시 한국의 주력 산업이 섬유였음을 여기서 딱 알 수 있다.
- 대한중공업 9억 환
- 동립산업 7억 환
- 극동연료 5억 환
- 대한양회 5억 환
- 대한중기 3억 환
- 조선방직 5억 환
- 기아산업(현 기아) 3억 5000만 환
- 락희화학(현 LG화학) 2억환
- 동신화학 2억 환
- 고려모직 2억 환
- 한선기계 1억 5000만 환
- 한국나일론 2억2500만 환
부정선거 수법
정말 한 두가지가 수법을 쓴게 아닌 총력을 다해서 한 부정선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정 투표 수법
- 투표함의 40%를 미리 자유당(이승만, 이기붕) 후보의 표로 채우고 시작하기
- 야당 참관인 쫓아내기
투표 현장의 야당 참관인을 쫓아냈다.
시계조작으로 투표시간이 끝냈다고 쫓아내거나 납치, 폭행도 했다. - 3인, 5인 투표
문맹률이 높았던 노년층이 많은 농촌에서 쓰던 수법. 조장은 당연히 자유당 후보를 찍게 했다. - 뇌물 살포, 조폭동원 협박
뇌물을 뿌려 자유당 투표를 독려하고 유권자에게 조폭을 동원하여 자유당 후보 찍을 것을 요구했다. - 죽은 사람을 선거인 명부에 올리기
- 군인은 담당관이 지켜보는 가운데 투표하기.
부정 개표 수법
- 투표함 바꿔치기
정전인 척 불을 끄그 투표함 바꿔치기 - 무효표 만들기
검표원이 야당후보가 찍힌 표를 보면 양 손에 인주를 묻힌 채로 오염시켜 무효표로 만들기 - 다른 후보의 표 뭉치 위 아래에만 이기붕의 표를 넣은 뒤 그 뭉치를 이기붕의 표로 집계 하기
총력을 다한 부정선거의 결과
기적의 득표율
- 이기붕 득표율 99%인 지역이 나옴
- 이기붕 득표율 115%인 지역이 나옴 (ㅋㅋㅋ)
선거 당일부터 시위 시작 (3.15 의거)
위에서 서술했듯 시민들도 정상적인 선거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선거 당일 마산에서 시위가 일어났고 경찰이 발포하여 다수의 사상자가 있었다.
이를 3.15 의거라고 부른다.
누구의 잘못인지?
이승만은 모르는데 자유당에서 알아서 벌인 대규모 사건.
이승만 하야의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이 부정선거로 인한 마산 3.15 의거를 계기로 이승만도 하야를 고려하고 있었다는 정황이 있다.
4.19 혁명 이후 하야 과정
이기봉 부통령 후보 먼저 ‘하야를 고려하고 있다’고 발표하고 이어서 이승만도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고 발표했다.
국민이 원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
국민의 대표인 의회가 사임을 요구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고 국회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는 결의문을 통과시켰다.
다음 날 이승만 대통령은 국회의 뜻을 받아들여 사임한다는 사임서를 제출하였다.
번외.
2011년 러시아 총선에서도 득표율이 100%가 넘는 선거가 벌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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