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국가 싱가포르.
싱가포르는 원래 말레이시아 연방 소속이었으나 독립을.. ‘당했다’
싱가포르 고대의 기록들
싱가포르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서기 2세기 그리스 수학자 프톨레마이오스의 기록이다. ‘사바나’라는 이름의 무역항으로 기록된 것이 싱가포르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
서기 3세기에는 싱가포르의 말레이어 이름이었던 ‘포라우 우종’의 중국어 음차인 蒲羅中(포라중)기록이 중국에 있다.
14세기에 잠시 항구로써 발전하다 싱가포르보다 더 북쪽에 있는 믈라카(Malacca)가 발전하면서 소수 원주민만 사는 빈 땅이 되었다.
믈라카의 위치 (빨간 핀) 현 말레이사의 수도인 쿠알라룸푸르와 싱가포르 사이에 있다.
싱가포르 역사 본격 시작 : 영국의 유입
동인도 회사의 토머스 스탬포드 래플스 경(Sir Thomas Stamford Bingley Raffles)이 싱가포르 남쪽의 작은 섬인 센토사 섬을 4년간 항구도시로 개발했고 여기서 부터 싱가포르의 항구로써의 역사가 본격 시작된다.
화교를 박해한 네덜란드와는 달리 어느정도 평등한 대우를 한 싱가포르는 빠르게 동남아 최대의 무역항으로 성장하였다. 동인도 회사 소유의 식민지에서 대영제국 소유의 식민지로 승격되고 홍콩, 인도, 호주, 캐나다와 연결하는 영국군의 거점이 되었다.
도시 개발을 위해 청나라 사람들(화교)을 고용했고 상인들도 함께 이민을 오면서 원주민보다 화교들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여기도 빠지지 않는 일본의 침략.
태평양전쟁 당시 싱가포르 전투에서 영국이 일본에게 패하며 점령당하고 화교들은 일본군에게 학살당했다.(1941년)
말레이시아의 영국으로부터의 독립
말레이시아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며 싱가포르도 말레이시아의 한 지역으로 독립을 하기를 원했다.
화교가 부담스러운 말레이시아
말레이시아는 말레이계가 대다수이지만 경제를 소수의 화교가 장악하고 있어 말레이시아 내의 화교들을 부담스러워했다.
싱가포르에 대한 감정도 말레이계들에게는 별로 좋지 않았다. 영국 식민지일 당시에 싱가포르에서 말레이시아를 관할했기 때문.
말레이시아 연방정부는 말레이계 우대정책을 하고 싱가포르 혼자서는 다른 대국 사이에서 살아남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시아 연방에 들기 위해 노력하고 말레이 공산당 무장투쟁 진압을 계기로 싱가포르는 말레이시아 연방에 합병된다.
합병 이후 말레이계 우대정책으로 인한 갈등이 깊어지고 리콴유(싱가포르 총리)와 인민행동당은 ‘말레이계 뿐만 아니라 말레이시아의 모든 민족이 말레이시아인이다’라는 주장을 하며 말레이계의 지지도 함께 얻고 있었다.
말레이계인들에게 중국인은 너무 똑똑해서 정치 주도권, 경제 주도권을 모두 빼앗길 것 같은 이미지였다.
실제로 동남아에서 화교들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지역들이 많다.
소수 화교들이 말레이 연방정부를 장악하여 화교만을 위한 정책을 추진할까 두려워했다. 리콴유는 말레이계 우대정책을 이해는 하지만 말레이계 정치인들의 정책은 민족갈등을 부추기고 경제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논리를 세우고 있었다.
말레이시아의 두가지 선택지
리콴유를 포함한 화교의 영향력이 계속 커지면서 말레이시아에게는 두 개의 선택지가 있었다.
- 리콴유 숙청후 자신들이 조종할 수 있는 정치인을 싱가포르에 심기
- 부담스러운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
축출 결정 : 원치 않는 독립을 당하다.
싱가포르 내부에서 민족갈등이 깊어지자 말레이시아는 국가 안정을 위해 1965년에 싱가포르를 연방에서 축출했다.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인 라만이 ‘하나의 연방 안에서 우리는 적이었지만 싱가포르가 독립한 순간부터 동지가 될 것이다’라고 리콴유에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독립 후 싱가포르의 홀로서기
싱가포르는 영국에게 우호적이었고 쉽게 영국 연방에 가입할 수 있었다.
싱가포르는 인접한 말레이시아 (조호르 지역:Johor)없이는 식량, 식수조차 조달하기 어려운 나라이기 때문에 국가 존속이 우려되는 상황이었다.
‘반공’을 강조하면서도 주변의 공산주의 국가들과 교류를 유지했다.
북한 대사관이 정상적으로 남아있는 몇 되지 않는 국가이다.
계획경제(사회주의) 개발
자본주의 시스템이지만 일당독제 계획경제 방식으로 운영했다.
먼 곳의 처지가 비슷한 나라 – 이스라엘
큰 나라 사이에 끼어있으면 멀리 있는 나라와 저절로 친해지게 된다.
싱가포르처럼 큰 나라 사이에 끼어있는 작은 나라인 이스라엘에서 무기를 수입, 군사자문을 받으면서 국방력을 키웠다.
동남아에 공산화가 잦아들다
동남아의 공산화가 잦아들고 인접국인 인도네시아에 친 서양쪽인 수하르토가 들어서면서 동남아 정세가 안정되어 싱가포르에게 큰 위협은 생기지 않았다.
연방 축출 당시 말레이시아 총리인 라만의 말처럼 말레이와 우호적인 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인도네시아의 동남아 국가로써의 정체성
인도네시아는 화교가 절대 다수인 국가이지만 친중이라고 보기에는 어렵다.
중국을 가장 잘 이해하고 있는 화교들이 대다수라 그런 것일까? 중국에 이런 저런 요구에 끌려다니지 않고 적당한 거리두기를 하면서 항상 ‘동남아 국가’임을 강조하고 있다.
현재의 민족 구성
화교(중국계) 74%, 말레이계 13%, 인도계 9.1%(영국 유입 당시 인도 유입도 함께 있었음), 기타 3.3%
중국계 말레이시아인이 절대 다수이며 홍콩, 대만과 마찬가지로 본토(대륙)에서 새로 유입된 중국인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