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인? 고려시대에 나간 민족인가?

드라마 ‘태양의 후예’에서 고려인 등장인물이었던 ‘리예화’가 한 말이다.

“한국말 한다고 다 한국사람인줄 아는가?”

맞다.

해외에 나간 한국사람들의 가장 큰 착각이

‘한국말 하는 사람은 다 한국인인줄 안다’는 것이다.

한국말을 할줄 아는 다른 동양계인은 차치하고서라도 러시아, 중앙아시아, 중국 국적의 한국 민족들도 많다.

이런 사람들을 붙잡고 ‘한국인이냐?’ 물으면 ‘아니다.’라고 대답한다.

한민족(韓民族)이지만 한국인은 아니다. 한국 본토에서 자란 한국인은 이 ‘민족’과 ‘국적’의 개념을 많이 혼동한다.

한민족인지 궁금하면 붙잡고 ‘조선민족이오?’정도로 물어야 그렇다고 대답해줄 것이다.

고려인도 한국 본토 밖에서 대를 이어온 한민족이다.

고려인은 어떻게 러시아, 중앙아시아인이 되었는가?

1단계 : 연해주 이주.

조선족과 비슷한 경로인데 일제 탄압, 함경도 홍수로 인해 터전을 잃고 만주, 연해주로 이주한 조선인들이다.

청일전쟁 직후에 러시아는 청의 연해주 땅을 얻었고 일제와 홍수로 인해 조선인들은 러시아로 넘어가고 있었는데 러시아 입장에서는 새로 생긴 영토에 사람들이 많이 필요했기에 조선인들의 유입을 강력하게 막지 않았다.

만주족, 한족(漢族)은 러시아어 사용과 러시아 문화를 거부하고 통제가 되지 않는 어려움이 있었는데 조선인들은 러시아 문화를 수용하고 있기에 후에는 조선인들의 이주를 지원해주었다.

독립운동 지원

러일전쟁 후에 조선인들의 러시아 유입이 가속화되고 러시아에 이주하여 성공한 조선인들이 러시아로 이주한 독립운동가, 의병들을 많이 지원해주었다.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안중근을 지원했다고 알려진 최재형이다.

세계 1차대전 때에는 러시아 군대에 입대해 독일군과 싸웠다.

임시정부 수립

대한 임시정부는 상해에만 있던게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 같은 독립운동을 하는게 아니었다.

한성(서울)임시정부, 연해주 임시정부가 있었고 한성, 상해와 입장이 크게 달라 단일 임시정부로 합쳐지진 못했다.

일본의 공격

한국에 ‘적백내전’으로도 많이 알려진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고려인 단체는 볼셰비키 정부군을 지지하기로 결의했고 이에 일본은 대항군을 지원한다는 명목으로 블라디보스톡 주변지역으로 진입하여 조선인들의 정착지를 공격하여 연해주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저지했다. 위에서 언급한 최재형이 이 때 사망하였고 이를 ‘연해주 4월 참변’이라 부른다.

2단계 : 강제 이주

스탈린 정권하에서 위의 ‘연해주 4월 참변’등 소련 내 조선인의 존재가 일본을 자극하는 요소라고 판단하여 조선인들을 강제로 기차에 싣고 중앙아시아로 이주시켰다.

체첸의 강제이주때 처럼 조선인 지도자들은 감옥으로 가거나 처형당했다.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기차안에서 죽은 조선인도 많았다.

반대로 중앙아시아의 우크라이나 민족이 연해주로 강제 이주되기도 했다.

당시 러시아 정보기관이었던 NVKD문서에 따르면 러시아에 거주하던 조선인 중에 일제에 협력한 이들이 많아 일제의 러시아 연해주 침략우려가 커졌음이 나타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공개된 문서에는 소련이 소수민족에게 지급하는 지원금을 받아 조선인이 독립운동 자금으로 쓰고 있어 일본과의 외교 마찰 우려를 보고하는 문서도 있었다.

이래 저래 러시아의 조선인들은 러-일 관계에 있어서 부담스러운 존재였다.

3단계 : 정착

조선인들은 관개시설을 설치하고 카자흐 지역에 이미 정착한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아 벼농사를 시작하였다. 3~4년 만에 고려인들은 카자흐에서 일상을 회복하였다.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고려인들 – 임차농업?

‘고본질’이라는 고려인의 독특한 임차농업 방식이 있었다.

공산주의에서는 금기시 될 것 같은 농업방식이지만 고려인들은 이렇게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농장 관리자들은 정부에서 지정한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집단농장 체제의 일반적인 소련농장에서는 근로자들이 열심히 일할 동기가 부족하여 농장의 생산성이 낮았다.

고려인 농장 작업조는 농장 관리자에게 땅을 빌려 농사를 잘 짓고 할당량보다 더 많이 수확하여 남는 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사적인 이익을 챙겼다.

농장 관리자 입장에서 손쉽게 할당량을 채울 수 있기에 인기가 많았다 한다.
(참고문서 : 소련 한인들은 어떻게 ‘양파 밭의 제왕’이 되었나)

농업에서 두각을 나타낸 고려인들 – 체첸인 지원

체첸인들은 산악지형에 익숙한 민족이어서 중앙아시아의 환경에 잘 적응하지 못했다. 중앙아시아에서 벼농사에 먼저 성공한 고려인들은 농업 기술을 전수해주고 아동 보육, 농장 고용등을 했다고 전해진다.

스탈린 사후 일부는 캅카스 지역으로 이주하였는데 야채와 과일농사로 이 지역에서 고려인들의 인상이 좋게 남았다고 한다.

캅카스 지역. 조지아 주변의 산악지역이다.

1990년대 체첸사태로 터전을 잃고 다른곳으로 많이 떠났다.

언어

중국 조선족과 마찬가지로 함북방언에 가까운 언어를 쓴다.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면서 본토(남한, 북한)와 멀어져 교류가 끊어져 지금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고려인은 많이 없다.

중국 조선족은 북한과 교류가 많았고 특히 연변의 조선족은 조선족 인구가 많고 조선족 학교까지 따로 있기에 그들의 언어(조선어)가 계속 쓰이고 있지만 소수만 중앙아시에아 남았던 고려인 특성상 언어가 쭉 내려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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